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을 시조로 하는 집안. 탄금대의 장수 신립과 인조반정의 공신 신경진 부자가 이 집안 사람이다.
신립 申砬
1546~1592 · 조선 중기 · 무신
새재인가 탄금대인가, 조선 최고의 기병장의 마지막 선택
신립의 실제 일생
신립(1546~1592)은 평산 신씨 생원 신화국의 아들로, 22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선전관과 도총부의 벼슬을 거쳐 진주판관을 지냈고, 1583년 온성부사로서 니탕개가 이끈 여진의 침입을 막고 두만강 건너 그 근거지를 쳤다. 그 공으로 1584년 함경북병사가 되었으며, 이후 함경남병사·평안병사·한성부판윤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가 되어 보검을 받고 충주로 내려갔다. 종사관 김여물 등이 험한 조령을 지키자고 했으나, 그는 기병을 쓰기 위해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4월 28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에게 크게 패하고 김여물 등과 함께 남한강에 몸을 던졌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신사임당(1504~1551)은 진사 신명화와 용인 이씨(이사온의 딸)의 딸로 강릉 북평촌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일곱 살에 안견의 그림을 스스로 본떠 배웠다. 1522년 덕수 이씨 이원수와 혼인했으나 아들 없는 친정의 딸로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친정에 머물렀고, 그해 아버지를 여의었다. 서울과 파주 율곡리, 평창 봉평 등지를 오가며 살았고 1536년 강릉에서 셋째 아들 이이를 낳았다. 1541년 서울로 올라와 시댁 살림을 맡았고, 1551년 남편과 아들들이 평안도에 간 사이 세상을 떠났다. 풀벌레·포도·산수 등을 그렸으며, 맏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도 그림과 글씨로 이름을 남겼다.
강릉 북평촌 외가에서 태어나 자란 딸. 일곱 살에 안견의 그림을 스스로 본떠 그렸고, 같은 시대 사람은 그의 포도와 산수를 "안견 다음"이라 했다. 혼인한 뒤에도 남편의 동의를 얻어 친정에 머물렀고, 마흔이 다 되어서야 서울 시댁 살림을 맡았다. 훗날 사람들은 그를 율곡의 어머니로만 기억하려 했다. 1510년, 외가의 마당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