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어매(呂御梅)를 시조로 하는 집안. 조선 초 개성유후 여칭, 숙종 때 영의정 여성제, 해방 정국의 몽양 여운형이 이 본관이다.
여운형 呂運亨
1886~1947 · 광복 전후 · 독립운동가·정치가
좌와 우 사이에 서서 하나의 정부를 말하다
여운형의 실제 일생
여운형(1886~1947)은 경기 양평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 호는 몽양이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개신교에 들었으며, 부친상을 마친 뒤 집안 노비를 풀어 주었다. 평양 신학교와 난징 금릉대학에서 공부했고,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이끌며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보냈다. 1919년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을 지냈고, 그해 도쿄에서 일본 고위 관리들을 만나 자치론을 물리치고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1920년 고려공산당에 들었고 1922년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다. 1929년 상하이에서 붙잡혀 징역 3년을 살았고,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되었으나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신문이 문을 닫았다. 1944년 비밀리에 조선건국동맹을 만들었고,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었으며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1946년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벌였고 1947년 근로인민당을 만들었다. 좌우 양쪽에서 십여 차례 테러를 당했고,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에서 저격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양평 양반집 맏이로 태어나 집안 노비 문서를 불태웠고, 상하이에서 파리로 대표를 보냈고,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을 말했다. 해방되던 날 그는 서울에서 나라의 틀을 세우려 했고, 그 일로 칭송과 비난을 함께 받았다. 좌우가 갈라지는 자리에서 하나의 정부를 말하던 그는 1947년 여름 거리에서 쓰러졌다. 그 갈림길마다 당신이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