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피란 일기 『쇄미록』을 남긴 오희문, 영의정 오윤겸, 병자호란의 삼학사 오달제가 나온 집안.
오달제 吳達濟
1609~1637 · 조선 중기 · 문신
스물아홉, 만 마리 소도 돌려세우지 못한 사람
오달제의 실제 일생
오달제(1609~1637)는 해주 오씨 오윤해의 아들로, 큰아버지 오윤겸에게 배웠다. 1627년 사마시에, 1634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정언·지평·수찬을 거쳐 1636년 부교리가 되었다. 그해 화친을 꾀하던 최명길을 탄핵하는 상소를 홀로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걸어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고, 이듬해 청이 척화신을 내놓으라 하자 윤집과 함께 스스로 나섰다. 청 진영에 끌려가 끝내 굽히지 않았고, 1637년 음력 4월 19일 심양 서문 밖에서 윤집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먼저 죽은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라 불린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오희문(1539~1613)은 해주 오씨 장성현감 오경민의 아들로, 외가인 영동에서 태어나 자랐고 집은 서울 관동에 있었다. 부인은 연안 이씨다. 1591년 11월 처남인 장수현감 이빈 등과 영동의 외가를 찾고 장흥·성주의 노비에게서 신공을 받으려고 종 둘을 데리고 남행길에 올랐다가, 이듬해 4월 전라도 장수에서 임진왜란 소식을 들었다. 장수현감의 가족과 영취산 등지에서 86일을 숨어 지냈고, 예산에서 피란 온 가족을 다시 만났다. 1593년 돌림병이 돌자 가족이 흩어졌고 그는 임천에 세 해를 우거했다. 맏딸을 함열현감 신응구에게 시집보내 그 도움으로 살았고, 왜군이 다시 온다는 소식에 맏아들 오윤겸이 현감으로 있던 평강으로 옮겨 네 해를 살았다. 1601년 서울로 돌아왔다. 1591년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쓴 피란 일기 『쇄미록』 7책이 보물로 전한다. 아들 덕에 선공감 감역이 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벼슬 없는 선비 오희문은 1591년 겨울, 남쪽 노비들에게서 신공을 받아 오려고 종 둘을 데리고 서울 집을 나섰다. 길어야 석 달이라던 그 길에서 임진왜란을 만났다. 그는 아홉 해 석 달 동안 떠돌며 무엇을 먹고, 누구에게 빌고, 누구를 잃었는지 하루하루 적었다. 그 일기가 『쇄미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