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을 시조로 받드는 집안. 병자호란 때 험천에서 전사한 최진립의 자손들이 훗날 "경주 최부잣집"을 이루었다.
최진립 崔震立
1568~1637 · 조선 중기 · 무신
임진년의 의병, 일흔을 앞두고 다시 칼을 차다
최진립의 실제 일생
최진립(1568~1637)은 경주 최씨 최신보의 아들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최계종과 의병을 일으켰고, 1594년 무과에 급제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의 왜군을 무찔렀고, 이어 도산 싸움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1615년 부사로 있다가 능창군 추대 사건에 엮여 갑산으로 귀양 갔고, 인조반정 뒤 풀려나 경기수사·삼도수군통어사·전라수사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공주영장으로 충청감사 정세규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향하다 용인 험천에서 청군과 싸워 전사했다(음력 1636년 12월, 양력 1637년 1월). 셋째 아들 최동량이 시신을 찾아 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뽑혔으며, 시호는 정무(貞武)다.
최치원(857~?)은 6두품 최견일의 아들로, 868년(경문왕 8) 열두 살에 당나라에 들어가 874년 빈공 진사시에 급제했다. 876년 선주 율수현위가 되었다가 그만두었고, 879년 이후 회남절도사 고변의 막하에서 관역순관·도통순관으로 문한을 맡았으며, 881년 「토황소격문」을 지어 이름을 떨쳤다. 885년(헌강왕 11) 신라로 돌아와 시독 겸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듬해 『계원필경』 등을 헌강왕에게 바쳤다. 지방의 태수를 지내다 894년(진성왕 8) 시무 10여 조를 올려 아찬이 되었으나 진골 귀족의 견제 속에 뜻을 펴지 못하고, 각지를 떠돌다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908년 무렵까지 글을 남겼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받아 문묘에 배향되었다.
신라 6두품 최견일의 아들. 열두 살에 당나라로 건너가 빈공과에 붙었고, 황소의 난 때 쓴 격문 한 장으로 당나라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고국 신라에서 그는 진골이 아니었다. 시무 10여 조를 올리고도 뜻을 펴지 못한 그는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갔고, 그 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바닷길과 산길을 당신이 고른다.
최제우(1824~1864)는 경주 최씨 최옥의 아들로 경주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가 출신으로 아버지를 여읜 뒤 여러 해 떠돌며 장사를 하고 의술·복술을 익히거나 글을 가르쳤고, 1856년부터 천성산 등에서 구도 수련을 했다. 1860년 4월 5일 용담정에서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하고 동학을 창도해 이듬해 포교를 시작했다. 관의 지목을 받아 남원 은적암에 피신했다가 돌아와 1862년 각지에 접주를 두었고, 1863년 최시형에게 도통을 물려주었다. 그해 겨울 선전관 정운구에게 제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1864년 3월 10일 대구에서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경주 가정리의 몰락 양반 최옥이 예순이 넘어 얻은 아들. 어머니가 재가한 사람이라 과거의 문은 처음부터 닫혀 있었다. 열 해를 장삿길로 떠돌던 그는 서른일곱 살 봄, 용담정에서 하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적었다. 그가 연 가르침은 동학이라 불렸고, 나라는 그것을 좌도(左道)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