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학의 큰 스승 김장생의 집안. 그 증손 김만기의 딸이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가 되었고, 김만기의 아우 김만중은 귀양지에서 『구운몽』을 썼다고 전한다.
김만중 金萬重
1637~1692 · 조선 후기 · 문신
아버지 없이 태어나, 어머니를 위해 꿈을 쓰다
김만중의 실제 일생
김만중(1637~1692)은 김장생의 증손이며,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익겸의 유복자로 어머니 해평 윤씨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1665년 정시 문과에 급제했고,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패하자 관작을 잃었다가 1679년 복귀해 공조판서·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이 되었다. 1687년 후궁 장씨 집안을 둘러싼 발언으로 선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고, 1689년 기사환국 뒤 남해에 위리안치되었다. 그사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나 장례에 가지 못했고, 1692년 남해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운몽』·『사씨남정기』를 지었고 우리말로 쓴 글이라야 참된 문학이라 했으며, 뒤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김덕령(1567~1596)은 광산 김씨로 광주 석저촌 사람이며 아버지는 김붕섭이다. 스무 살에 형 김덕홍과 함께 성혼에게 배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고경명의 막하에 들었다가 형의 권고로 어머니를 모시러 돌아왔고, 형은 그해 금산에서 전사했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형조좌랑과 충용장의 군호를 받았고, 이듬해 세자의 무군사에서 익호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곽재우와 함께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를 지켰으나 강화 회담으로 큰 싸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복을 장살한 일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그해 7월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받아 체포되어 여섯 차례 국문을 받다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1661년 신원되었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