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高句麗

성씨와 본관이 자리 잡기 전, 고구려를 산 사람들. 본관 대신 나라 이름으로 찾는다.

주몽 朱蒙

기원전 58~기원전 19 · 삼국시대 · 왕족

알에서 났다는 활잡이, 쫓겨 간 땅에 나라를 열다

주몽의 실제 일생

주몽(기원전 58~기원전 19)은 고구려의 시조다. 삼국사기는 성을 고씨, 이름을 주몽(추모·중해라고도 한다)이라 했고, 광개토왕릉비는 추모왕이라 적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하백의 딸 유화가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를 만난 뒤 동부여 금와왕의 궁에서 알을 낳았고 거기서 주몽이 나왔다고 한다. 활을 잘 쏘아 부여 말로 주몽이라 불렸고,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 등이 해치려 하자 오이·마리·협보와 함께 남쪽으로 달아나 졸본에 이르렀다. 기원전 37년 스물둘에 고구려를 세웠고, 이듬해 비류국 송양왕의 항복을 받아 그 땅을 다물도라 했다. 행인국과 북옥저를 쳐서 성읍으로 삼았다. 기원전 24년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세상을 떠나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장사 지냈다. 기원전 19년 4월 부여에서 온 아들 유리를 태자로 세웠고, 그해 9월 마흔으로 세상을 떠나 용산에 묻혔다. 시호는 동명성왕이다. 건국 연대와 부여 시조 동명과의 관계를 두고는 학계에 여러 견해가 있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명성왕」 encykorea.aks.ac.kr/Article/E0016431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명왕 신화」 encykorea.aks.ac.kr/Article/E0016436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류국」 encykorea.aks.ac.kr/Article/E0025129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화부인」 encykorea.aks.ac.kr/Article/E0042024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서노」 encykorea.aks.ac.kr/Article/E0030121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리왕」 encykorea.aks.ac.kr/Article/E0041388
  7. 위키문헌 「삼국사기/권13」(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ko.wikisource.org/wiki/삼국사기/권13
  8. 위키문헌 「번역:삼국사기/권13/유리왕」 ko.wikisource.org/wiki/번역:삼국사기/권13/유리왕
  9. 위키백과 「동명성왕」 ko.wikipedia.org/wiki/동명성왕

동부여 금와왕의 궁에서 자란 아이. 알에서 났다는 말이 늘 따라다녔고, 일곱 살에 제 손으로 깎은 활로 백 번 쏘아 백 번 맞혔다. 왕자들의 칼을 피해 남쪽으로 달아나 졸본에 고구려를 세웠다. 어디까지가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전설인지, 그 경계 위를 당신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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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乙支文德

생몰년 미상 · 삼국시대 · 무신

시 한 수와 거짓 항복, 살수에서 수 30만을 꺾다

을지문덕의 실제 일생

을지문덕은 고구려 영양왕 때의 대신이다. 삼국사기는 그의 집안 내력을 알 수 없다고 했고,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있고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적었다. 생몰년과 출신은 전하지 않는다. 612년 수 양제가 113만여 명으로 쳐들어오자, 우중문·우문술이 이끄는 별동대 30만 5천이 압록강 서쪽에 모였다. 그는 왕명을 받아 거짓으로 항복하러 적진에 들어가 허실을 살피고 돌아왔고, 싸울 때마다 일부러 져서 적을 지치게 하며 평양성 30리 앞까지 끌어들였다. 이때 우중문에게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을 알거든 그치라는 뜻의 오언시를 보냈다. 다시 거짓 항복으로 물러날 구실을 주어 수군이 돌아서자, 7월 살수에서 강을 반쯤 건넌 적의 후군을 쳐서 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요동성까지 살아 돌아간 수군은 2,700명이었다고 한다. 이를 살수대첩이라 한다. 그 뒤의 행적은 기록에 없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을지문덕」 encykorea.aks.ac.kr/Article/E0042969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살수대첩」 encykorea.aks.ac.kr/Article/E0026415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우중문」 encykorea.aks.ac.kr/Article/E0041699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양왕」 encykorea.aks.ac.kr/Article/E0037554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문진」 encykorea.aks.ac.kr/Article/E0044291
  6. 위키문헌 「삼국사기/권44」(열전 을지문덕) ko.wikisource.org/wiki/삼국사기/권44
  7. 위키문헌 「번역:삼국사기/권20/영양왕」 ko.wikisource.org/wiki/번역:삼국사기/권20/영양왕

삼국사기는 그의 집안 내력을 알 수 없다고 하면서도, 성품이 침착하고 굳세며 꾀가 많고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적었다. 612년 수 양제의 대군이 몰려왔을 때, 그는 적진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가 걸어 나왔고, 적장에게 시를 보냈고, 살수에서 돌아가는 적의 등을 쳤다. 그 앞과 뒤는 기록이 비어 있고, 그 빈칸은 당신이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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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374~412 · 삼국시대 · 왕족

열여덟에 즉위해 64성 1,400촌을 얻은 영락대왕

광개토대왕의 실제 일생

광개토왕(374~412)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이름은 담덕이다. 386년 태자가 되었고,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391년(삼국사기는 392년) 열여덟에 즉위해 영락이라는 연호를 썼다. 즉위 첫해 백제의 석현성 등 10여 성과 바다에 둘러싸인 관미성을 빼앗았고, 395년 거란 계통의 비려를 쳤다. 396년 몸소 백제를 쳐 58성 700촌을 얻고 아신왕에게서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았다. 400년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에 들어온 왜를 물리치고 가야 지역까지 쫓았으며, 404년 대방 지역에 들어온 왜를 깨뜨렸다. 서쪽으로는 후연과 요동을 두고 다투어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을 지켜 냈고, 410년 동부여를 굴복시켰다. 412년 서른아홉으로 세상을 떠났다(삼국사기는 413년). 414년 아들 장수왕이 능 곁에 비를 세워 64성 1,400촌을 얻은 공을 새겼다.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개토왕」 encykorea.aks.ac.kr/Article/E0005057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개토왕릉비」 encykorea.aks.ac.kr/Article/E0005058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객」 encykorea.aks.ac.kr/Article/E0012631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미령전투」 encykorea.aks.ac.kr/Article/E0004844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국양왕」 encykorea.aks.ac.kr/Article/E0003338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실성마립간」 encykorea.aks.ac.kr/Article/E0033674
  7. 위키문헌 「번역:삼국사기/권18/광개토왕」 ko.wikisource.org/wiki/번역:삼국사기/권18/광개토왕
  8. 위키백과 「광개토대왕」 ko.wikipedia.org/wiki/광개토대왕
  9. 위키백과 「광개토대왕릉비」 ko.wikipedia.org/wiki/광개토대왕릉비

고국양왕의 아들 담덕. 열여덟에 왕위에 올라 영락이라는 연호를 썼고, 스물두 해 동안 남으로 백제, 북으로 거란과 후연, 동으로 동부여까지 말을 달렸다. 그가 한 일은 아들이 세운 높이 6미터가 넘는 비석이 말해 준다. 비석이 말하지 않은 것은 당신이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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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長壽王

394~491 · 삼국시대 · 왕족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아흔여덟까지 산 태왕

장수왕의 실제 일생

장수왕(394~491)은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거련(또는 연)이다. 광개토왕 18년에 태자가 되었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비문의 해로 412년, 삼국사기로 413년). 414년 아버지의 능 곁에 광개토왕릉비를 세웠다.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남조의 동진·송·남제와 북조의 북위에 모두 사신을 보내며 균형을 잡았고, 436년 북위에 쫓긴 북연 왕 풍홍을 받아들였다가 그가 송으로 가려 하자 죽였다. 466년에는 북위의 혼인 요구를 거절했다. 475년 몸소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의 도읍 한성을 쳐서 개로왕을 죽였고,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사기는 이에 앞서 승려 도림이 백제에 들어가 그 나라 살림을 기울게 했다고 적었다. 481년 신라의 미질부까지 나아갔다. 491년 세상을 떠났는데 삼국사기는 나이 아흔여덟이라 적었고, 북위 효문제가 애도하며 강(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손자 문자명왕이 뒤를 이었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수왕」 encykorea.aks.ac.kr/Article/E0048605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개토왕릉비」 encykorea.aks.ac.kr/Article/E0005058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로왕」 encykorea.aks.ac.kr/Article/E0001616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림」 encykorea.aks.ac.kr/Article/E0015615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자명왕」 encykorea.aks.ac.kr/Article/E0019639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풍」 encykorea.aks.ac.kr/Article/E0024781
  7. 위키문헌 「삼국사기/권25」(백제본기 개로왕 21년) ko.wikisource.org/wiki/삼국사기/권25
  8. 위키백과 「장수왕」 ko.wikipedia.org/wiki/장수왕
  9. 위키백과 「풍홍」 ko.wikipedia.org/wiki/풍홍

광개토왕의 맏아들 거련. 아버지의 비석을 세우고, 국내성을 떠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의 한성을 떨어뜨렸다. 일흔아홉 해 동안 왕이었고, 삼국사기는 그가 아흔여덟에 눈을 감았다고 적었다. 북위와 남조 사이에서 줄을 고르는 일부터 바둑판 하나로 이웃 나라를 기울이는 일까지, 긴 치세의 갈림길마다 당신이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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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 溫達

?~590 · 삼국시대 · 무신

바보라 불린 사내, 공주와 혼인해 장수가 되다

온달의 실제 일생

온달(?~590)은 고구려 평원왕·영양왕 때의 장수로, 『삼국사기』 열전 「온달전」이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온달전에 따르면 그는 몹시 가난해 빌어먹으며 눈먼 어머니를 모셔 바보 온달이라 불렸는데, 어려서 잘 울던 평원왕의 딸이 상부 고씨에게 시집가라는 왕명을 거스르고 궁에서 쫓겨나 그와 혼인했다. 공주는 금팔찌를 팔아 집과 밭, 소와 말을 마련하고 나라에서 내놓은 병든 말을 사서 길렀다. 온달은 해마다 3월 3일 낙랑 언덕의 사냥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후주 무제가 요동을 치자 이산 벌판에서 선봉으로 공을 세워 대형 관등을 받았다고 한다. 영양왕이 즉위하자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땅을 되찾겠다며 계립현과 죽령 서쪽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나섰으나,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후주와의 싸움이 실제로 있었는지, 아단성이 서울의 아차산성인지 단양의 온달산성인지는 지금도 말이 갈린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달」 encykorea.aks.ac.kr/Article/E0038837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평강공주」 encykorea.aks.ac.kr/Article/E0059861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양 온달산성」 encykorea.aks.ac.kr/Article/E0013626
  4. 위키백과 「온달」 ko.wikipedia.org/wiki/온달
  5. 『삼국사기』 권45 열전 온달 zh.wikisource.org/wiki/三國史記/卷45
  6. 『삼국사기』 권19·20 고구려본기 평원왕·영양왕 zh.wikisource.org/wiki/三國史記/卷20

고구려 평원왕 때 사람. 집이 몹시 가난해 빌어먹으며 눈먼 어머니를 모셨고, 해진 옷과 떨어진 신으로 저잣거리를 다녀 사람들이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고 『삼국사기』 열전은 적었다. 그 집 문 앞에 궁에서 쫓겨난 공주가 찾아왔다. 바보가 장수가 되기까지를 당신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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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淵蓋蘇文

?~665 · 삼국시대 · 무신

정변으로 나라를 쥐고 당 태종과 맞선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실제 일생

연개소문(?~665)은 고구려 말기의 귀족으로 개금이라고도 하며, 중국 사서에는 천개소문이라 적혔다.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 자유와 아버지 태조가 모두 막리지에 올랐다. 아버지가 죽은 뒤 자리를 이으려 하자 귀족들이 반대했으나 머리 숙여 청해 이었다. 천리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던 642년, 영류왕과 대신들이 그를 없애려 하자 부의 군사를 사열한다며 대신들을 불러 죽이고 궁에 들어가 왕을 죽인 뒤, 왕의 조카 장(보장왕)을 세우고 막리지가 되었다. 그해 겨울 군사를 청하러 온 신라 김춘추를 맞았고, 643년 당에서 도사와 『도덕경』을 들여왔으며, 644년 신라 공격을 멈추라는 당의 요구를 물리쳤다. 645년 당 태종이 쳐들어왔으나 안시성을 넘지 못하고 물러갔다. 662년 사수에서 당의 방효태 군을 무너뜨렸다. 665년 무렵 세상을 떠났고, 아들들이 다투는 사이 668년 고구려가 망했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개소문」 encykorea.aks.ac.kr/Article/E0036672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태조」 encykorea.aks.ac.kr/Article/E0036948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류왕」 encykorea.aks.ac.kr/Article/E0037359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장왕」 encykorea.aks.ac.kr/Article/E0023525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천리장성」 encykorea.aks.ac.kr/Article/E0055847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시성전투」 encykorea.aks.ac.kr/Article/E0034848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만춘」 encykorea.aks.ac.kr/Article/E0035506
  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수전투」 encykorea.aks.ac.kr/Article/E0079561
  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남생」 encykorea.aks.ac.kr/Article/E0036729
  10. 위키문헌 「삼국사기/권49/개소문」 ko.wikisource.org/wiki/삼국사기/권49/개소문
  11. 위키문헌 「삼국사기/권41」(열전 김유신 상) ko.wikisource.org/wiki/삼국사기/권41
  12. 위키문헌(중문) 「日本書紀/卷第廿四」(황극기 원년) zh.wikisource.org/wiki/日本書紀/卷第廿四
  13. 위키문헌(중문) 「日本書紀/卷第廿七」(천지기 3년) zh.wikisource.org/wiki/日本書紀/卷第廿七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막리지에 오른 연씨 집안의 아들. 642년 왕과 대신들이 그를 없애려 하자 그가 먼저 움직였고, 그 뒤 스무 해 넘게 나라를 쥐고 당 태종과 고종의 군사를 맞았다.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는 그를 임금을 죽인 흉포한 사람으로 적었고, 훗날 어떤 이들은 나라를 지킨 영웅이라 불렀다. 그 사이 어디에 설지 당신이 고른다.

연개소문으로 살아 보기
고구려의 이름난 인물
  • 주몽기원전 58~기원전 19고구려를 세운 활의 명수
  • 광개토대왕374~412영토를 크게 넓힌 정복 군주
  • 장수왕394~491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왕
  • 을지문덕생몰년 미상살수에서 수나라 대군을 막은 장수
  • 연개소문?~665당나라와 맞선 대막리지
  • 온달?~590평강공주와 혼인한 장수

족보로그는 삼국사기·조선왕조실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 같은 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게임이에요. 가문 점수는 게임 점수일 뿐, 실제 집안의 높고 낮음과는 상관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