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877~943)은 송악의 호족 왕륭의 맏아들로, 자는 약천이다. 896년 아버지가 송악을 들어 궁예에게 귀부하자 스무 살에 발어참성의 성주가 되었다. 궁예 휘하에서 900년 광주·충주·청주 등을 평정하고, 903년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금성을 쳐 나주로 삼았으며, 909년 이후 나주 앞바다에서 견훤의 수군을 깨뜨렸다. 913년 파진찬 겸 시중이 되었으나 궁예의 관심법에 모반을 추궁당하기도 했다. 918년 6월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의 추대로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해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했고, 이듬해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927년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 등을 잃고 겨우 몸을 피했으나 930년 고창 전투에서 이겨 형세를 뒤집었다. 935년 아들에게 쫓겨난 견훤을 맞아들이고 신라 경순왕의 귀부를 받았으며, 936년 일리천에서 신검의 군대를 깨뜨려 후삼국을 통일했다. 943년 박술희에게 「훈요」를 전하고 그해 5월 세상을 떠났다.
송악 바닷가 호족의 맏아들. 스무 살에 궁예의 장수가 되어 바다와 육지에서 공을 세웠고, 마흔둘에 장수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공산에서는 견훤에게 크게 져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끝내 신라와 후백제를 품었다. 칼보다 혼인과 너그러움으로 나라를 꿰맨 그 길을 당신이 고른다.
공민왕(1330~1374)은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아들로 이름은 기(祺), 뒤에 전(顓)이다. 1341년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했고, 1349년 원 황족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했다. 1351년 10월 원이 충정왕을 폐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1356년 5월 기철·권겸·노책 등 원에 붙은 세력을 숙청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없앴으며 쌍성총관부를 되찾고, 6월 원의 연호를 쓰지 않기로 했다. 홍건적이 두 번 쳐들어와 1361년 개경이 함락되자 복주(안동)로 피란했고, 1363년 흥왕사에서 김용의 무리에게 죽을 뻔했으며, 1364년 원이 세운 덕흥군과 최유의 군사를 물리쳤다. 1365년 2월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난 뒤 신돈에게 나랏일을 맡겨 전민변정 사업을 벌였으나 1371년 7월 신돈을 유배 보낸 뒤 처형했다. 1374년 9월 환관 최만생과 자제위 홍륜 등에게 시해되었다.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천산대렵도」가 그의 그림으로 전하며, 능은 개풍의 현릉으로 노국대장공주의 정릉과 나란히 있다.
충숙왕의 아들 강릉대군 왕기는 열두 살에 원나라 서울로 가서 황제 곁을 지켰고, 원 황족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한 뒤 원의 뜻으로 고려 왕이 되었다. 그 왕이 1356년 원나라에 붙은 기철 일당을 쳤다. 홍건적, 흥왕사의 칼, 원이 보낸 새 왕, 그리고 공주의 죽음. 그 이십삼 년을 당신이 다스린다.
광종(925~975)은 태조와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아들로 이름은 소(昭), 자는 일화이다. 945년 왕규의 난을 거쳐 즉위한 동복형 정종이 949년 병이 깊어지자 왕위를 물려받았다. 즉위 초에는 『정관정요』를 읽고 광덕이라는 연호를 쓰며 조용히 다스렸는데, 최승로는 이 시기를 삼대에 견줄 만하다고 했다. 956년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들을 양인으로 되돌리고 호족의 힘을 꺾었으며, 958년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처음 과거를 열었다.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을 정하고 개경을 황도라 불렀다. 같은 해 권신의 고발로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을 내친 뒤로 참소가 잇달아 옥이 넘쳤고, 공신과 호족은 물론 종친까지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만년에는 귀법사를 세우고 재회를 자주 열었다. 975년 5월 세상을 떠났고, 『고려사』는 즉위 초의 선정과 중년 이후 참소를 믿고 살육을 일삼은 일을 함께 적었다.
태조의 아들이자 정종의 동복 아우인 왕소는 형들의 짧은 치세와 왕규의 난을 지켜본 뒤 스물다섯에 왕이 되었다. 즉위 초에는 『정관정요』를 읽으며 조용히 다스렸고, 956년부터 노비를 풀어 주고 과거를 열었으며, 960년부터는 공신과 호족을 쓸어냈다. 최승로는 그의 첫 여덟 해를 삼대에 견주고 그 뒤를 매섭게 꾸짖었다. 그 저울을 당신이 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