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 서성의 후손들이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집안. 서명응·서호수·서유구 3대가 농학과 천문으로 가학을 이었다.
서유구 徐有榘
1764~1845 · 조선 후기 · 문신
쫓겨난 판서 집 아들, 18년 백수로 백과사전을 쓰다
서유구의 실제 일생
서유구(1764~1845)는 이조판서 서호수의 아들로 태어나 당숙 서철수에게 입양되었다. 1790년 문과에 급제해 초계문신이 되었고, 순창군수로 있던 1798년 농서를 구하는 정조의 윤음에 답해 도마다 농학자를 두어 그 지방 농법을 조사하자고 건의했다. 1806년 숙부 서형수가 김달순의 옥사에 엮이자 벼슬에서 물러나 열여덟 해 동안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그사이 800여 종의 책을 참고해 농사·의약·음식·건축·경제를 아우른 113권의 『임원경제지』를 엮기 시작해 만년에 완성했다. 다시 벼슬에 나와 1834년 전라감사로 있을 때 『종저보』를 지어 흉년을 이길 고구마 재배를 권했고, 이조판서·대제학에 이르렀다.
서거정(1420~1488)은 대구 서씨 서미성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권근의 딸이며, 매형은 최항이다. 1444년 문과에 급제했고, 1453년 수양대군을 따라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5년 세자우필선, 1456년 집현전이 폐지되자 성균사예가 되었다. 1457년 문과 중시에 급제했고,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 안남 사신과 시를 겨뤘다고 전한다. 1466년 발영시, 등준시에 급제했고, 1467년 형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한 뒤 23년 동안 문형(文衡)을 맡았다. 1471년 좌리공신 3등으로 달성군에 봉해졌고, 우찬성·좌찬성에 올랐다. 『동문선』『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 편찬을 이끌었고 『필원잡기』『동인시화』『태평한화골계전』을 지었다. 여섯 임금을 섬겨 45년을 조정에 있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