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미상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기록에 본관이 전하지 않는 사람들.

황진이 黃眞伊

생몰년 미상 · 조선 전기 · 시인

동짓달 긴 밤을 잘라 접어 둔 송도의 시인

황진이의 실제 일생

황진이는 중종 무렵 송도(개성)에서 이름을 떨친 기생으로, 본명은 진(眞)이라 하고 기명은 명월(明月)이다. 생몰년은 알 수 없고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삶을 직접 적은 사료는 없으며, 『송도기이』『어우야담』『연려실기술』『금계필담』 같은 야담과 필기에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할 뿐이다.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한다. 화담 서경덕을 흠모해 거문고와 술을 들고 찾아가 시를 익혔다고 하며,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파계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이라 불렸다고 한다. 한시 「박연폭포」「만월대회고」와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 등이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데, 시조 가운데 「청산은 내 뜻이요」는 작자가 분명하지 않다. 훗날 평안도 도사로 가던 임제가 그의 무덤에 제문을 지어 조상했다가 조정의 비난을 받았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진이」 encykorea.aks.ac.kr/Article/E0065346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경덕」 encykorea.aks.ac.kr/Article/E0027580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제」 encykorea.aks.ac.kr/Article/E0047637
  4. 위키백과 「황진이」 ko.wikipedia.org/wiki/황진이
  5. 위키문헌 「박연」 ko.wikisource.org/wiki/박연

송도의 기생 명월. 본명은 진(眞)이었다고 하고, 언제 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남은 것은 시조 몇 수와 한시 몇 편, 그리고 사람들이 덧붙이고 부풀린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그는 화담 앞에서 이치를 묻고, 동짓달 긴 밤을 잘라 접는 노래를 지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아무도 모르니, 이번 생은 당신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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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 安龍福

생몰년 미상 · 조선 후기 · 어부

울릉도를 두고 두 번 일본에 건너간 동래 사람

안용복의 실제 일생

안용복은 동래 사람으로, 동래 수군의 노 젓는 군사인 능로군으로 일했다고 하며 일본 쪽 기록에 옮겨진 그의 호패에는 서울 사는 오충추의 사노(私奴)로 적혀 있다. 부산 왜관을 드나들며 일본말을 익혔다. 1693년 봄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일본 어부들과 마주쳐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고, 돗토리번과 나가사키, 쓰시마를 거쳐 돌아왔다. 이 일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울릉도를 둘러싼 외교 교섭이 벌어졌다. 1696년 그는 승려 뇌헌 등과 함께 다시 울릉도를 거쳐 오키섬과 돗토리번에 건너가 울릉도와 자산도가 조선 땅이라고 주장했다. 귀국 뒤 나라 몰래 국경을 넘고 관원을 자칭한 죄로 사형까지 논의되었으나, 공이 있다는 의견에 따라 유배되었다. 그 뒤의 행방은 기록에 없다. 에도 막부는 그가 다시 건너가기 전인 1696년 정월에 일본 사람의 울릉도 도해를 금하기로 정해 두었고, 이 결정은 쓰시마를 거쳐 조선에 전해졌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용복」 encykorea.aks.ac.kr/Article/E0034915
  2. 위키백과 「안용복」 ko.wikipedia.org/wiki/안용복
  3. 위키백과(일본어) 「安龍福」 ja.wikipedia.org/wiki/安龍福
  4. 시마네현 竹島資料室 www.pref.shimane.lg.jp/admin/pref/takeshima/web-takeshima/takeshima04/takeshima04-2/takeshima05-k.html
  5. 일본 내각관방 영토·주권대책 자료 www.cas.go.jp/jp/ryodo_kr/kenkyu/takeshima/chapter02_section01_movie_02.html
  6. 위키백과(일본어) 「竹島一件」 ja.wikipedia.org/wiki/竹島一件
  7. 매일신문 「[여기는 독도] 역사⑥ 안용복 2차 도일」(2009) www.imaeil.com/page/view/2009060509255517700
  8. 매일신문 「독도지킴이 안용복에게서 배운다」(2020) www.imaeil.com/page/view/2020111617264389100

부산 왜관을 드나들며 일본말을 익힌 동래의 노꾼. 1693년 울릉도에서 일본 어부들과 마주쳤다가 일본으로 끌려갔고, 세 해 뒤에는 스스로 다시 바다를 건넜다. 숙종실록에는 그의 진술이, 일본 쪽 기록에는 그의 깃발 그림과 조사 기록이 남았고, 두 나라 기록은 그를 다르게 말한다. 그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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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崔在亨

?~1920 · 대한제국 · 독립운동가

노비의 아들, 연해주 동포들의 난로가 되다

최재형의 실제 일생

최재형(1860~1920, 1858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다)은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 출신 최흥백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9년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 지신허로 옮겼고, 1871년 집을 나와 포시에트 항에서 러시아 배의 견습 선원이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무역회사와 도로 건설 현장에서 통역으로 일했고, 러시아에 귀화해 표트르 세묘노비치라는 이름을 얻었다. 군납업으로 큰 재산을 모아 한인을 고용했고, 1893년 얀치헤(연추)의 책임자로 뽑힌 뒤 도헌이 되어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유학생을 보냈다. 1907년 군대 해산 뒤 연해주로 온 의병을 도왔고 1908년 동의회를 이끌며 안중근 등의 국내 진공 작전을 뒷받침했다. 1910년 『대동공보』를 인수해 발행했고 권업회 등에서 활동했다. 1919년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사양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 한인 사회를 습격한 4월 참변 때 우수리스크에서 붙잡혀 김이직·엄주필 등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찾지 못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재형」 encykorea.aks.ac.kr/Article/E0057620
  2. 위키백과 「최재형 (독립운동가)」 ko.wikipedia.org/wiki/최재형_(독립운동가)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아홉 살에 두만강을 건넜다. 열한 살에 집을 나와 러시아 배를 탔고, 통역과 군납으로 큰돈을 벌어 연해주 한인 마을의 도헌이 되었다. 동포들은 그를 러시아 말로 난로, "페치카"라 불렀다. 두만강을 건너던 해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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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 許憲

1885~1951 · 광복 전후 · 법조인

인권 변호사에서 신간회·남로당, 그리고 월북까지

허헌의 실제 일생

허헌(1885~1951)은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호는 긍인이다. 보성전문학교와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에서 공부하고 대한제국 말 변호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등의 변론을 맡았고, 의열단·조선공산당 사건과 노동자·빈민 사건을 무료로 변론해 이름을 얻었다. 1920년대 보성전문학교 교장과 동아일보 사장 대행을 지냈고, 신간회에서 좌파를 대표해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알리려는 민중대회를 계획하다 붙잡혀 1932년까지 옥고를 치렀고 변호사 자격을 잃었다. 1943년 단파방송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 해방 뒤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 남조선노동당 위원장을 지냈다. 북으로 간 뒤 1948년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었고, 1951년 8월 전쟁 중에 세상을 떠났다. 병사했다는 기록과 청천강에서 배가 뒤집혀 숨졌다는 증언이 엇갈린다. 생년은 1884년으로 적은 기록도 있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허헌」 encykorea.aks.ac.kr/Article/E0063178
  2. 위키백과 「허헌」 ko.wikipedia.org/wiki/허헌
  3. 나무위키(미러) 「허헌」 thewiki.kr/w/허헌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헌영」 encykorea.aks.ac.kr/Article/E0021357

함경도 명천 출신으로 대한제국 마지막 해들에 변호사가 되었다. 3·1운동 지도자들과 의열단, 조선공산당 사건 피고들을 무료로 변론해 김병로·이인과 함께 이름난 인권 변호사가 되었고, 신간회를 이끌다 두 번 옥살이를 했다. 해방 뒤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를 꾸렸고, 남로당 위원장을 거쳐 북으로 가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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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林巨正

?~1562 · 조선 전기 · 도적

명종 때 황해도를 흔든 도적

임꺽정의 실제 일생

임꺽정(?~1562)은 경기도 양주의 백정 출신으로, 임거정(林巨正)이라고도 적는다. 여러 해 흉년이 이어지고 윤원형·이량 같은 권신이 날뛰며 관리의 수탈이 심해지자, 처음에는 몇 사람을 모아 도둑질을 하다가 무리를 키워 황해도 구월산 등지를 소굴로 삼았다. 1559년부터 황해도와 경기도의 관아를 습격하고 곳간을 털어 백성에게 나누었다고 하며, 고을 아전과 백성 가운데 그와 내통하는 이가 많았다. 1559년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이 그를 치다 목숨을 잃었고, 1560년에는 한양에 나타났다가 아내가 붙잡혔다. 그해 겨울 참모 서림이 붙잡혀 계획을 털어놓았으나 무리는 평산에서 관군을 물리쳤다. 조정은 남치근을 토포사로 보냈고, 1562년 정월 그는 서흥에서 붙잡혀 그달 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실록의 사관은 도적이 생긴 까닭을 수령의 가렴주구와 재상의 탐욕에서 찾았다. 민가를 불태운 포악한 도적이라는 기록과 관곡을 나눈 의적이라는 평이 함께 전한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꺽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47411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꺽정」(소설) encykorea.aks.ac.kr/Article/E0047412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림」 encykorea.aks.ac.kr/Article/E0027722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치근」 encykorea.aks.ac.kr/Article/E0012197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종」 encykorea.aks.ac.kr/Article/E0018366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22352
  7. 위키백과 「임꺽정」 ko.wikipedia.org/wiki/임꺽정
  8. 나무위키 「임꺽정」 namu.wiki/w/임꺽정
  9. 서울신문 「임꺽정에서 진주갑부까지」 m.seoul.co.kr/news/2012/12/01/20121201021007

양주의 백정 집안에서 났다는 것 말고는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1559년부터 세 해 동안 황해도와 경기도의 관아를 털고 관군을 물리쳐, 조정은 토포사까지 보내고서야 그를 잡았다. 실록의 사관은 도적이 생긴 까닭을 도적이 아니라 수령과 재상에게서 찾았다. 이야기는 양주의 우물가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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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金活蘭

1899~1970 · 일제강점기 · 교육자

첫 여성 박사·이화의 교장, 그리고 친일 논란

김활란의 실제 일생

김활란(1899~1970)은 인천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기득, 세례명 헬렌을 한자로 옮겨 활란이라 했다.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첫 졸업생으로 마쳤고, 1922년 YWCA 창설에 나섰으며,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과 보스턴대학 대학원을 거쳐 1931년 컬럼비아대학에서 한국 여성으로 처음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 근우회 회장을 지냈고, 이화여전 교수·학감·부교장을 거쳐 1939년 교장이 되었다. 중일전쟁 뒤 애국금차회 간사, 이화애국자녀단 단장,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등을 맡았고, 강연과 기고로 징병과 학병을 독려했다. 광복 뒤 1946년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어 1961년까지 이끌었고, 1950년 전시 내각의 공보처장, 『코리아타임스』 사장, 유엔 총회 한국 대표 등을 지냈다. 1970년 2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의 행적을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활란」 encykorea.aks.ac.kr/Article/E0011114
  2. 위키백과 「김활란」 ko.wikipedia.org/wiki/김활란

인천 배다리에서 태어난 기득이는 일곱 살에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그 이름을 한자로 옮겨 활란이 되었다. 이화학당 첫 대학 졸업생, 미국에서 철학박사를 받은 첫 한국 여성, 이화여전의 교장. 그리고 전쟁 말기 학생들을 동원 행사에 세우고 징병을 독려한 연사. 이 게임은 편을 들지 않는다. 그가 무엇을 지키려 했고 무엇을 내주었는지를 보여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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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미상의 이름난 인물
  • 최재형?~1920노비의 아들, 연해주 동포들의 난로가 되다
  • 허헌1885~1951인권 변호사에서 신간회·남로당, 그리고 월북까지
  • 김활란1899~1970첫 여성 박사·이화의 교장, 그리고 친일 논란
  • 황진이생몰년 미상송도의 이름난 시인 기생
  • 임꺽정?~1562황해도를 흔든 도적
  • 안용복생몰년 미상울릉도를 지킨 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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