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헌(1570~1652)은 돈녕부도정 김극효의 아들로, 세 살 때 큰아버지 김대효의 양자가 되었다. 1596년 문과에 급제했고, 정인홍을 탄핵했다가 밀려났으며 1613년 파직되어 안동 풍산으로 내려갔다. 인조반정 뒤 대사간·대사헌·판서를 지냈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화친을 반대했다. 항복 뒤 안동으로 물러났다가 청의 출병 요구에 반대한 일로 1640년 심양에 압송되어 1645년에 돌아왔다. 효종이 대로(大老)로 받들었고, 1652년 세상을 떠나 뒤에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옥균(1851~1894)은 안동 김씨 김병태의 맏아들로 충청도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당숙 김병기에게 입양되었다.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했고, 박규수의 문하에서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홍영식·서광범·박영효 등과 개화당을 이루었다. 1881년 말부터 일본을 시찰했고, 1883~1884년 일본에서 차관 교섭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켜 새 정부를 세웠으나 청군의 공격으로 사흘 만에 무너졌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 정부에 의해 오가사와라섬과 홋카이도로 보내지는 등 냉대를 받다가 1894년 3월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되었다. 갑오개혁 뒤 복권되었고, 1910년 충달(忠達)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병태의 맏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에 당숙 김병기의 양자가 되었다. 스물두 살에 알성시 장원.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지구의를 돌려 본 청년은 일본을 다녀온 뒤 조선을 통째로 바꾸고 싶어 했다. 1884년 겨울, 그는 우정국 낙성 잔치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새 정부는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